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수 전쟁 (문단 편집) === [[영양왕]] === 590년에 즉위한 [[영양왕]]은 [[평원왕]]의 장자로, 풍채와 정신이 뛰어나고 호쾌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수나라가 강대해지고 수나라의 포섭이 이어지자, 일부 [[속말말갈]]의 무리가 고구려를 뒤로 하고 수나라에 합류했다. 이때 추장인 [[돌지계]](突地稽)의 아들이 [[고구려-당 전쟁]]과 [[나당전쟁]] 때 나타나는 당군 지휘관 [[이근행]](李謹行)이다. 또한 거란의 한 부족인 출복부도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나라에 내부(內附)해 버렸다. 또한 첩보를 통해 수나라가 고구려와 다른 나라들을 정벌할 군대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는 계속 수나라의 팽창과 영향력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앞의 위협적인 국서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 통일로 기세등등해진 수 문제는 돌궐과 토욕혼은 물론 베트남, 백제, 신라 등 주변국들로부터 동등한 위치가 아닌 왕과 신하의 관계로써 조공을 받는 등 주변국들은 스스로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수 문제는 만족하지 못했다. 바로 동북아시아 북방의 맹주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변국들은 수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 뜻으로 조공도 바쳐 일찌감치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오직 고구려만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뿐더러 조공도 거부하고 있었다.[* 이미 앞선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고구려는 주변 유목민족들을 관리하던 맹주였다. 더군다나 광개토대왕 때부터 고구려만의 천하관이 성립하여 고구려를 세상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더더욱 수나라의 중화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한 점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위]]에게는 그렇게 매년 수차례씩 조공을 하던 고구려가 왜 더 강대한 통일제국인 수나라에게는 조공을 거부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삼국사기]]》나 《[[위서(역사책)|위서]]》의 내용과 달리 일반적인 조공관계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생각보다 더 혼란스러운 시기로 북조와 남조가 서로 지속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거기다 북조국가는 선비족과 한족이 융합돼 사회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외부의 문제로 눈길을 보낼 수 없었으며 이마저도 실패해서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뉘어졌다. 그런 판국에 이제 막 국가란 것을 세워서 화북을 지배하기 시작한 선비족이 이미 후한대에 성립되어 한창 전성기에 도달한 고구려를 우습게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당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를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중국쪽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도 없었기에 상호 이해관계가 맞물려 별다른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수륙군 30만 명을 은밀히 준비하는 한편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수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하라는 것과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함은 물론 만약 조공을 거역할 시에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양씨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앉히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고구려가 조공을 거부할 시 친필 내용대로 수륙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파일:영양왕 수나라 침공.png|width=500]] 그런데 정작 영양왕의 고구려군이 598년에 수를 향해 선제 공격을 날렸다. 수나라의 반응을 한번 보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요서(遼西)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한 것. 이때 영양왕은 [[말갈]]/[[거란]]의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했는데, 정황상 대규모 침공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형태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영교, 《고구려 전쟁의 나라》] 당시 임유관에는 위충이란 장수가 지키고 있었는데 위충은 이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임유관 초토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시 그 시작점은 임유관인데 이 임유관이 초토화된 덕에 수는 어쩔 수 없이 임유관 후방에서 출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도발에 무척 진노한 문제는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기로 결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